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20 사건 (문단 편집) == 배경 == [[상하이 1월 폭풍 사건]] 이후, 중국 전역에서는 탈권 현상이 벌어져 [[홍위병]]들이 [[코뮌]]을 수립하고 당과 군의 간부들을 닥치는대로 납치, 비판하고 파괴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들의 도를 넘는 행위에 불만을 품은 [[쉬샹첸]], [[예젠잉]] 등 군부는 [[린뱌오]]의 동의를 구해 [[마오쩌둥]]에게 군이 이 무질서를 진압하게 해달라는 <8항 명령>을 제출하여 비준을 받았다. 이에 1967년 2월에서 3월에 걸쳐 3월 흑풍이라 불리는 잔혹한 진압이 이어졌다. 중국 각지의 군부는 홍위병들의 박해를 받는 당의 관계자들과 밀접한 개인적 교분을 갖고 있었을 뿐더러 군구 사령관급 고급 장교들까지 마구 조리돌리고 모욕하는 홍위병들의 행위를 전혀 참아줄 수도 없었으니만큼 조반파 홍위병들을 응징하고 질서를 회복하는데 찬성하였다. 하지만 1967년 [[2월 역류]]로 인하여 원수들이 비판을 받고 실각하자 홍위병들은 [[인민해방군]]의 진압행위를 반대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4월 2일, [[인민일보]]는 <혁명적인 젊은이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중앙위원회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사위원회]]가 지시를 내려 군이 대중조직을 반혁명조직으로 선포하거나 군을 비판하는 조직을 탄압하거나 대규모 체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에 따라 군의 진압능력을 대폭 약화시켰다. 이에 기가 살아난 조반파 홍위병들은 군수품 운반 차량과 선박을 공격해 자체적으로 무장을 갖추는 등 더욱 날뛰어대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의 난동으로 인하여 중국 전체의 경제 자체가 붕괴되어가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홍위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